1. 주 예수그리스도를 공부하는 이유
이번에는 “주 예수그리스도”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의 주제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며, 예수님를 믿은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하는데 그리스도를 잘 모르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생활한다는 것이 말이 안되듯이 그리스도를 모르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이 나는 예수님을 얼마만큼 많이 알고 있으며, 내 입에서 얼마만큼 예수님을 증거하고 살고 있는지?
과연 어떤 사람을 만나서라도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말을 정확하게 할 수 있게 준비된 상태인지?
예수님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떤 삶을 사셨고 어떤 말씀을 하셨고 누구에게 위로를 주시고 누구에게 책망을 하시고 어떤 내용을 가르치셨는지 상세하게 알아볼 목적으로 이 교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 4:19;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 9:9; ¶ 예수님께서 거기를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금 받는 곳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그분을 따르니라.
예수그리스도께서 가르친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을 참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지 않느냐!
말씀에 기초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주 예수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아야 괴는데 그분을 잘 모르면서 맹목적인 믿음으로 살 수는 없겠죠. 그분의 이름만 외친다고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분께서 하신 일들과 그 의미를 제대로 알 때 비로소 우리가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 수가 있다고 봅니다.
요 5:39; ¶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은 곧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들이니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내용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믿음, 소망, 사랑과 구원, 은혜 혹은 과학과 건강을 들춰내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 등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성경은 좋은 말씀이야!” 하면서 내가 스스로의 힘으로 양심과 도덕적인 삶을 사는데 도움을 주는 그런 형태로 한 개 한 개 말씀을 끄집어 와서 내 삶의 도덕적, 윤리적 지침서로 삼는 것은 성경의 주제 혹은 선후관계가 상당히 잘못된 것일 수 있습니다.
성경은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과 신약의 구속주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으로써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을 알려주는 것이 핵심입니다.[Lb1]
2.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그리스도 되시는 예수님
구약의 첫 시작은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이 함께 하면서 시작이 되지요.
그리고 신약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과 타락한 사람과 함께 시작합니다.
구약은 창조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창조주께서 모든 피조물의 주인(주님)이 되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구약은 창조주로부터 시작되고 신약은 구속주로부터 시작되는데 왜 그래야만 됩니까?
그 이유를 알아야 됩니다.
왜 구약은 창조주로부터 시작이 되고 신약은 구속주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하느냐?
창 1:31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매우 좋았더라. 그 저녁과 아침이 여섯째 날이더라.
Gen 1:31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구약에서 처음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완전하게(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매우 선하게 (창1:31 very good)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는데 그 형상을 타락하면서 잃어버렸어요.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되찾아 주시기 위해 구속주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되찾아 주시는 것을 우리는 구속(救贖, redeem))이라 하죠.
여기서 구속이란 검사가 죄인을 감옥에 가두는 게 아니고, 잃어버린 것을 원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회복시키시려 오신 하나님,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며 그리스도라 부릅니다.
창조하신 하나님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구약은 창조의 역사이며 신약은 회복의 역사입니다.
처음에 자연과 사람을 창조하셨지만, 사람이 타락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그 형상을 되찾기 위한 역사를 이루셨는데, 아브라함을 택해서 유대인을 만드시고, 이후 이스라엘 역사가 그리스도까지 쭉 이어지는 이유가 뭘까요?
신약의 구속주 그리스도께서 오셔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오시는 통로(길)를 만드신 거예요. 구약 유대인의 역사 전체가 그 일 때문에 필요했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역사가 대부분인 구약에서 현재 내 자신의 모습을 직접 대비시키면 오류가 생길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른 신앙생활의 모델을 찾기 위해 구약을 들추지만 신약시대인 현재의 상황에 직접 적용하기는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구약과 나 사이에 항상 예수그리스도가 들어가야 됩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예수그리스도를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 신약의 시대를 살아가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라고 질문을 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고 봅니다.
이 신약시대에 예수님을 생략하고 구약을 보면 많은 오류가 생깁니다.
유대인 족장들의 이야기와 출애굽역사 및 가나안 전쟁사와 가나안 정착과 통일왕국, 그 이후 유대인의 우상숭배 역사와 포로시대, 귀환시대의 여러 말씀을 가지고 신약의 교회에서 많은 설교를 하지만 예수그리스도가 빠져 버리면 지금도 율법 밑에 있는 구약시대가 돼 버려요.
지금은 은혜시대이며 교회시대입니다.
그런 부분을 생각하면서 예수그리스도의 역할이 우리에게 얼마만큼 중요한지 알게 될 때 예수님이 더 귀하게 여겨지겠죠.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되리라.
여기서 다른 번역본에 있는 대로 “죽은 것 같이” 가 아니라 “죽는 것 같이”로 되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봅니다. 즉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죽기 위해서 태어난다”라는 표현이 어울립니다. 이것은 항상 현재 시제로서 천 년 전의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죽음을 피할 수가 없다는 거죠.
“살게 된다”는 것은 미래 시제로써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아직도 구약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신약입니다.
3. 그리스도는 왜 오셨는가?
죽는 사람을 살게 해주시는 것이 그리스도 사역의 본질입니다.
그러면 죽는 것은 무엇이고 사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보다도 한번 태어나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만일 죽지 않는다면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은 완전히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보세요. 돈을 억 만금 준다 해도 죽는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지금 암에 걸려 오늘 내일 하는 사람한테 당신이 쓰는 조건으로 1억원을 줄게 한들 그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죽음 앞에 있는 사람에게 돈과 생명 중에서 택일하라고 하면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백 프로 생명을 선택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어 있는 나를 살려주는 분입니다.
죽는 것과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없으면 성경의 복음에 대한 말씀이 생각 속에만 있는 추상적 내용이 되어 버려요.
죽지 않고 살게 되는 것이 지옥을 면하게 되는 그것이 전부인지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실상은 지옥보다 훨씬 상위의 본질적인 개념이 따로 있어요. 그 개념 없이 지옥만 면하는 것으로 생각하니까 구원받았다 하고는 자기 맘대로 사는데 그것은 지극히 잘못된 것입니다. 실제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예수님이 나에게 무슨 일을 해 주셨는가에 대해서 정확한 깨달음이 있다면 세상으로 다시 되돌아 갈수 없는 것이 정상입니다. 돈 때문에 흔들리지 않아요. 내 수중에 돈이 없더라도 허덕이지 않게 된다고요.
예수 믿는다면서도 항상 세상 일 때문에 근심 걱정이 많은 이유는 예수님을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죽는 것이 무엇이고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되리라.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죽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죽는다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지옥에 가는 이유는 하나님과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지옥이 무서운 이유도 하나님과 분리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명의 부활한 몸을 입게 되면 내 속에 태양보다 더 큰 에너지가 들어오는데 지옥 불이 뭐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성도는 예수님께서 지옥에 계시면 나도 지옥에 간다는 것이 그 의미인 거죠. 나는 예수님과 분리될 수 없다. 예수님 계시는 그곳이 천국이다.
시 139: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리이까? 혹은 내가 주의 앞을 떠나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오며 내가 지옥에 내 침상을 펼지라도, 보소서, 주께서 거기 계시나이다.
부활한 몸을 생각하면 그게 이해가 되지요. 부활한 몸을 입게 되면 몸 속으로 무한대의 에너지가 들어와 버려요. 다니엘이 용광로 속에 들어갔지만 타지 않았죠.
단 3:25; 그가 응답하여 이르되, 보라, 내가 보니 결박이 풀린 네 사람이 불 한가운데서 걷고 있는데 그들이 아무 해도 입지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형체는 하나님의 아들과 같도다, 하더라.
사탄은 처음에 어떤 존재였어요? 불 가운데 오르내리는 존재예요.
겔 28:14; 너는 기름 부음 받은 덮는 그룹이라. 내가 너를 그렇게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거룩한 산 위에 있었고 불타는 돌들 한가운데서 오르내리며 다녔도다.
부활한 몸을 입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하면 지옥 불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요.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땅에서 받은 육신을 입고 있으니까 육신이 죽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붙들고 있는데 그게 아니라 구원받지 못하고 육신이 죽으면 나의 혼이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것이 죽음인 것입니다. 혼이 육신 속에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있는데 육신이 죽어 버리면 더 이상 기회가 없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은 언제 죽을 지 누구도 모릅니다. 오늘 일지 내일 일지.
살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예요. 하나님 안에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다 있어요.
창 2:7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실 때 먼저 살아있는 육신을 만드시고, 거기에 하나님 속에 있던 생명의 숨(영)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의 혼(자아)이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성령)이 사람속에 들어오시면 사람의 혼이 살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영이 나가버리면 나의 혼이 죽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의 정의 입니다.
육신이 썩어 소멸되는 그것만 죽음이라고 생각하면 성경의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육신이 안 죽을 사람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육신은 버려지는 거예요. 벌레가 껍데기를 벗어야(죽어야) 나비나 매미가 되어 공중을 날 수 있듯이, 우리가 부활할 때는 땅으로부터 온 이 육신을 벗고(죽고), 하늘로부터 온 영광스런 몸을 입게 될 텐데 땅에서 취한 이 육신의 옷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이 몸은 버려질 껍데기인데 여기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거죠.
우리가 아침마다 들여보는 거울이야 말로 불행의 원인인 이유는 거울은 육신의 모습은 비춰주지만 영혼의 모습은 비춰주지 못하죠.
육신의 모습을 비춰보면 안 좋은 것과 좋은 것을 구별하는 마음의 작용에 따라 좋은 것을 하고싶죠. 그게 육신의 정욕이고 안목의 욕망이고 세상의 영광을 취하고자 하는 죄의 길로 접어드는 출발점이 됩니다.
그리스 신화에 엄청 잘생긴 사람이 있었는데 자기가 자기 모습을 몰랐어요.
어느 날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하다가 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굶어 죽었어요. 거기서 수선화란 꽃이 하나 피었다는 이야기가 있죠.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보면 어떤 누구도 가꾸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육신을 가꾸는데 모든 것을 쏟아 붓게 되는데 그것이 죄를 짓는 첩경이 됩니다.
하나님은 육신이 아니라 영으로 오시기 때문에 육신에 집착하다 보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내 영이 어떤 상태인가를 보려면 성경을 봐야 됩니다. 말씀은 영과 혼의 거울이기에 말씀을 보면 내 영이 지금 까맣구나! 죽어 있구나! 그걸 알게 되죠.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살고 싶어 지겠죠.
창조주는 모든 피조물의 주인으로서 우리는 그분을 주님이라 부르는데 과연 그분이 진짜 나의 주인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 됩니다. 내 생각도 있습니다. 종이 자기 생각이 있어요. 근데 종이 자기 생각대로 살면 어떻게 됩니까? 주인이 쫓아 내든지 아니면 감옥에 넣어버려요. 주인 말을 듣지 않는 종은 더 이상 종이 아닙니다.
성경을 믿는다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셨고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면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마땅하죠.
요 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눅 6:46 ¶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들은 행하지 아니하느냐?
벧전 1:16 기록된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느니라.
레 19:2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라. 나 주 너희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는 거룩할지니라.
주님께서는 첫째로 세상은 악하니까 세상과는 분리되어 살아라 말씀하는데, 주님! 주님! 하면서 세상과 짝하고 있으면 말이 안맞죠. 그것이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는데 주인이 시키는 일은 한 개도 안하고 반대로 가면 그것은 주인을 조롱하고 욕보이는 거라고요. 거룩하다는 말의 뜻은 세상과는 분리되고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신약에서는 타락한 피조물이 창조주를 십자가에 못 박아요. 이 사건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깊이 생각해 봐야 됩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창조주께서 나만 창조하지 않고, 내가 먹고 숨쉬고 살아가는데 아무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을 주셨어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만드신 공기를 가져 가시면 몇 분 동안 살 수 있겠어요? 또 물이나 햇빛을 거두어 가시면 얼마동안 살 수 있겠어요?
삼성전자가 어떻고 마이크로소프트가 어떻고 애플이 어떻고, 화성 목성 해가 아니라 북극성까지 가는 우주선을 만든 들 그게 뭔 의미가 있냐고요? 공기 한 개만 싹 가져 가버려도 끝장나는데.
해 달 별, 공기와 물, 흙도 땅도 주셨고 모든 환경을 다 주시고 그리고 나를 여기 이 자리에 두셨는데, 나는 태어나서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으니까 그것이 눈물 날 정도로 너무너무 안 좋으시고 안타까우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몇 번 우셨는데 그 이유는 자기가 만든 사랑하는 피조물인 사람이 너무 불행한 것과 또 영원히 불행할 것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어떨 때 부모가 울어요? 부모의 눈물을 낼 수 있는 자식의 상태가?
예를 들면 자식이 진짜 몹쓸 병에 걸려서 회복 불가할 때 부모의 마음은 그냥 눈물이에요. 어떻게 방법이 없잖아요. 돈으로라도 된다면 빚이라도 그냥 억만금 내가지고 어떻게 해보겠는데 그것도 안된다면.
우리 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우리의 처지가 그런 겁니다. 이 우주를 다 주어도 자신이 사랑하시는 피조물인 나를 구해낼 수가 없는 거예요.
만일 이 우주를 주어서라도 구해 낼 수 있다면 이 우주를 주셨을 거예요. 그런데 불가능한 거예요. 왜? 생명은 생명으로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 19:21 네 눈이 불쌍히 보지 말라. 오직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을지니라.
이 우주는 생명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생명을 가지신 단 한분 하나님께서 생명을 버리셔야 하기 때문에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박히신 거예요. 박은 것이 아니에요.
구약과 신약 역사의 기본적인 줄거리는 바로 이런 내용으로, 구약이든 신약이든 창조주가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이유가 그런 거예요. 예수라는 사람이 계셨는데 그분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창조주(LORD,주님,여호와)로 계셨던 분입니다. 성경에 “여호와” 혹은 “주”는 영어로 “the LORD”예요. 즉 “the LORD”는 주님을 지칭합니다.
신약에서도 Our LORD, Jesus Christ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러면 여호와 예수님 이렇게 해야 되지만 성경에는 “주”라고 했는데, 구약에서는 어떤 번역자는 “여호와”라고도 하고 “주”라 하니까 혼돈스런 부분이 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에게 붙이는 주님하고 구약에 나오는 주님 혹은 여호와, 야훼와 같은 “YahVeh”이기 때문에 구약과 신약 모두 동일하게 “주”라고 호칭하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앞에 “주”는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과 같은 분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창조주이신 예수그리스도는 신약에서는 구속주 그리스도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즉 창조주이면서 구속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바로 나의 창조주시고 구속주이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만난 모든 사람들은 나의 또 다른 모습들로서 그 사람 대신에 나를 대입하면 정확합니다. 나는 빠져버리고 남들만 거기다 넣게 되면 나는 죄인에도 빠지고, 문둥병자에도 빠지고 소경에도 빠지고, 38년 된 불구자도 아니고 간음한 여인도 아니며, 바리새인도 사두개인도 제사장들도 서기관도 율법사도 아니면 과연 나는 누구란 말입니까?
신약과 구약에 나오는 모든 죄인들은 나(우리)와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것들은 아담의 후손인 사람 안에 다 들어있는 요소예요. 그 정도로 내 한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흉악하다고요.
자연인으로 우리들은 내 자신에 대해서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기준으로 볼 때 좋은 점은 한 개도 없어요. 먼지 한 톨만큼 잘 하는 거 없어요.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주실만큼 사랑하신다고요.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많이 오해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관점과 내가 나를 보는 관점이 완전히 반대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잘못이 생기는 거예요[Lb2] .
만일 내가 하나님 보시는 관점으로 나를 판단하고 평가를 한다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인생살이 자체가 달라진다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걸 가르치시려고 하시는 거예요.
4. 하나님의 어린양
요 1:29 ¶ 다음 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왜 하나님의 어린양이죠? 하나님의 어린양이 뭡니까?
여기 하나님의 어린양은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번제를 드린 양도 하나님께서 직접 준비하신 것이었습니다.
아벨이나 노아가 드린 제물도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으로 하나님 소유물이었습니다.
어린양의 주인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은 하나님의 것만 받아요. 사람인 내 것은 안 받아요. 그런데 우리는 내 것으로 많이 드리려고 해요. 나의 땀 나의 노력 내 것으로 드리니까 드린 가치에 대해서 보상을 원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은 신앙생활이 아니죠.
신앙생활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사는 거예요. 나의 노력과 내 땀으로 살면 내 힘으로 사는 것이며 나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소유로만 드리는데 하나님의 소유물이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여기 침례 요한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어린양은 예수님이죠.
신약에서는 벌써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 제사 지낼 제물이 왔어요. 무한대로 있어요. 그것을 드리면 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노력의 소산을 드리고 있어요. [Lb3]
월급의 십분의 일을 떼어서 드리면 그 사람의 마음은 뿌듯한 거예요. 자기가 자신의 것으로 했으니까. 자기가 뿌듯한 것은 자기 길로 간 거예요.
하나님의 길이 있고 자기 길이 있죠. 자기의 길은 항상 하나님의 길과 반대입니다.
자기의 길은 곧 자기의 노력이고 자기의 정성이고 모두 자기가 들어가는 것. Himself, ourself, myself 자기 스스로 가는 길은 하나님과 반대로 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반대에는 죄가 있고 죽음이 있고 불행이 있습니다.
사 55:7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분께서 풍성하게 용서하시리라. 8 ¶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과 같지 아니하며 내 길들은 너희 길들과 같지 아니하니라. 주가 말하노라. 9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들은 너희 길들보다 높으며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보다 높으니라.
우리는 신앙생활 한다면서 내 생각대로 내 판단대로 살고 있지 않느냐! 여기서 자기 길과 자기 생각을 버린다는 것은 마음의 작용으로 자아를 죽인다는 말입니다.
혹자는 그렇게 생각하겠죠. 아니 내 생각대로 안 살고 하나님 생각대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냐? 반문할 수도 있어요. 그 둘의 관계를 볼 때 행동은 같이 나올 수 있지만 그 동기가 틀릴 수 있다는 거예요. 내 판단이냐 하나님 판단이냐 그 부분은 “양심” 부분에서 거론했기 때문에 넘어가죠.
아담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태어나서 죽은 아담의 후손은 엄청나게 많을 겁니다. 한 천억 명 되려나. 그 사람들 안에는 황제나 왕도 있었지만 거지도 있었을 테고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기도 있을 것이고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겠죠.
그들 모두의 운명을 쥐고 있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운명을 쥐고 있다고 얼마만큼 느끼느냐? 예수님을 정확하게 알수록 많이 느끼겠죠.
이 땅에서 삶과 내세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서 모든 것의 키를 예수님이 갖고 있어요.
우리는 성경에서 내세만 생각하고 있는데 내세 뿐만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노력과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개척해 가는 것을 좋다고 하죠. 사실 내세는 육신의 죽음 이후의 일이니까 그때의 것을 맡기는 것은 쉽지만, 현실인 지금은 내 힘으로 살고 내 생각으로 사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길 수 있지만 그런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현재의 세상 삶에 집착하게 되는 이유는 실제적으론 내세를 안 믿기 때문입니다. 내세를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안 믿는 거예요.
내세가 영원히 있다고 생각하고, 내가 육체안에서 백 년을 산다고 해도 영원에 비교하면 그것은 없없는 것과 다름없는 시간입니다. 영원의 시간에 비추면 백 년은 없는 시간입니다. 그 없는 것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못 믿기 때문에 육신의 삶인 100년이 크게 보이는 거예요. 육신 속에서 사는 100년이 진짜 1초도 안 되는 찰나라고 생각하면 여기에 무슨 가치를 부여하겠습니까? 저도 60년을 넘어 앞으로 길게 살면 한 30년 짧게 살면 내일이라도 갈 수가 있지만 그 세월이 영원에 비교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것은 그냥 먼지보다 못한 그런 시간인데 그것을 얼마만큼 자각하느냐에 따라서 거기에 무슨 화낼 일이 있고 무슨 섭섭할 일이 있고 무슨 큰 가치를 부여할 일이 있겠냐는 거지요? 길어봐야 백년 정도 되는 찰나의 육신의 삶과 영원한 부활의 삶을 비교하면 그렇다는 겁니다.
5.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마 22:42 이르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누구의 자손이냐? 하시매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라, 하니
이런 예수님의 질문에 각자가 대답해 봅시다.
현재에도 우리 각자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옛날 제자들에게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에게 동일하게 물어보시는 거예요.
예수님의 답변을 한 번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본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요 5:39 ¶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은 곧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들이니라.
“성경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증언기록이다”.
그리스도는 나의 영원한 생명이며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인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그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조금 복잡해 집니다. 어떤 대상을 믿는 데는 두 가지의 상황이 맞아져야 하는데, 믿을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을 믿는 자가 있어요.
믿어야 되는 사람은 우리 모든 아담의 후손들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분은 예수님인데, 내 입장에서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반문을 한번 해 보는 것이 당연하겠죠.
내가 왜 예수님을 믿어야 되는지 질문을 해 보셨냐고요?
아니면 그냥 믿어야 된다고 하니까 “믿습니다” 했나요?
믿어야 될 이유를 내 안에서 찾아 질문을 해보고 변론을 해보셨습니까?
믿을 필요성이 있을 때 믿는 것이 당연한 이치 아닙니까?
우리는 지금 가장 중요한 영원한 생명과 죽음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필요와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자각(깨달음)이 없다면 믿을 필요가 없겠죠.
“왜 예수님을 믿어야 됩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 스스로 갖고 있어야 됩니다. 성경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진 마음을 회개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가 자기 마음대로 살아보니까 누가 생각났습니까?
자신이 버리고 떠나온 아버지가 생각나는 거예요. 아, 이제 나는 아버지에게 가야만 되는구나. 아버지에게 가야 될 필요성이 먼저 생겼습니다.
그 필요성이 각자에게 있느냐 그 이야기예요.
눅 15:17 그제야 그가 정신을 차리고 이르되, 내 아버지께는 빵이 풍족하여 나누어 줄 수 있는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나는 굶어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내 아버지께 가서 그분께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을 대적하여 죄를 짓고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사오니
탕자도 갔으니까 나도 지게지고 간다 그거 아니다는 거예요. 장에 가는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으니까 가는 것이잖습니까. 내가 쌀이 떨어져 배가 고파 쌀을 사야 되니까 장에 가는 거죠. 쌀도 있고 배추도 있고 과일도 있고 다 있으면 장에 갈 필요는 없는 겁니다.
내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죽는 것은 무엇이며 사는 것은 또 뭐야?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데 내가 아쉬운 게 뭐 있어? 이런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필요가 있냐고요?
예수님께서 이것 저것 주신다고 하지만 그런 것들이 뭐 필요하겠어요? 예수님에게 갈 필요가 없으면 믿을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렇지만 진짜 배고프면 쌀 사러 갑니다.
예수님께 “당신이야 말로 그리스도이시며 나의 구속주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려면 내가 죽어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깨닳음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나는 펄펄 살아 움직이고 있는데 살려주는 그리스도가 뭐 필요하냐고요. 앞으로 일어날 지옥 갈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예요. 지옥은 미래의 얘기입니다. 지금 죽어 있는 겁니다.
엡 2:1 또 그분께서 범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죽었던 너희를” 에베소 사람들이 사도 바울 앞에 아직도 살아 있는데 언제 죽어 봤어요? 지금 숨쉬고 살아 있지만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는 모두 죽어 있으니까 살아나야 된다고 강력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살려주려고 오신 겁니다. 그렇지만 내가 죽어 있다는 것을 모르면 이 말씀을 믿을 수 없게 되는 거죠.
거듭나는 것은 죽음 이후 미래에 일어날 지옥에 가는 것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현재의 일입니다. 현재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죽어 있어요. 그런데 왜 그걸 못 느끼느냐?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죽음이란 창조주 하나님과 분리된 거라 했죠.
내가 죽어 있다는 것을 알면 살고 싶게 되며, 하나님과 함께 하고 싶어 지겠죠. 그러면 간구와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 저 진짜 살아서 하나님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살려주세요” 그 외침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지금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고 해도 마음으로부터 애통해 하거나 아무 생각이 없다면 하나님 찾지 않는다는 겁니다. 옆에서 아무리 찾아라 찾아라 해봤자 그것은 목마르지 않는 말을 물가에 데리고 가서 물 먹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동일한 물을 먹이는 행위인데 한 쪽의 행위는 생명을 살려주는 것이고 한 쪽의 행위는 고문이에요. 물 마시고 싶지 않은데 물 먹이면 물고문이예요. 사막에서 며칠 굶어 입이 타는 목마른 자에게는 한 모금의 생수가 생명수이겠지만 박종철 같이 눕혀서 코로 한 방울 넣는 그것이 뭡니까 완전히 독보다 더 센 고문이라고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물고문을 잘 참아요.
우리는 물고문도 잘해요. 구원받아야 된다 구원받아야 된다 그것은 물고문입니다.
“구원 받아야 된다”하면서 물고문 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창조주는 누구이며 당신 자신은 누구이며 당신은 왜 새로운 생명을 받아야 되며, 창조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그런 것을 가르칠 때 비로소 자기 속에서 갈증이 나오는 거예요. 그럴 때 참 믿음이 나오는 거예요. 갈증이 없는 사람한테 고문을 해서 물 먹여 보세요. 나중에 욕 나오지.
아 5:16 그분의 입은 지극히 달콤하니 참으로 그분은 모든 것이 사랑스럽도다. 오 예루살렘의 딸들아, 이분이 나의 사랑하는 이시요, 이분이 나의 친구시로다.
예수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말씀이죠. 이분은 입이 달콤해요, 이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송이꿀 보다 더 달다고 하는데 나에게 과연 그러한가?
손자가 사랑스러운데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어요. 달콤하면 먹고싶고 사랑스러우면 보고싶은 거죠. 예수님이 그런 분인데 잘 모를 때에는 밋밋하게 대하지만, 그분이 진짜 달콤하신 분이고 사랑스러우신 분이 된다면 자연히 그분을 갈구하게 되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느 날 어떤 상황이 서로 떼어 놓으면 어떻게 되어요? 그것을 원망하게 되지요. 예를 들어 돈 때문에 사랑스러운 가족을 떠나서 이국 만리에 가게 되면 가족과 헤어져서 못 보잖아요. 그러면 돈이 원수라고 말하죠.
나와 예수님 사이를 갈라놓는 것은 세상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그런 마음이 있어야 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세상으로 안 가지요. 세상으로 갔다가 여기 더 달콤한 게 있고 여기 더 사랑스럽고 보고 싶은 게 있으면 예수님께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벧전 2:6 그런즉 성경 기록에도, 보라, 내가 선택한 보배로운 으뜸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당황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는 말씀이 들어 있느니라.
“으뜸 모퉁잇돌”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마22: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누구의 자손이냐?” 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 있는 거예요.
으뜸 모퉁잇돌을 알려면 피라미드를 이해하면 됩니다. 피라미드에는 모퉁잇돌이 다섯개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으뜸 모퉁잇돌은 꼭대기에 있는 거예요. 지금 기자의 대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그것만 없어졌어요.
으뜸 모퉁잇돌이 잘 놓이면 집이 안 무너져요. 피라미드를 많이 연구하지만 아직도 미스테리가 많습니다. 한 변이 230m, 높이가 147m, 전체무게는 5900만톤이 넘는 엄청난 규모에도 불구하고 몇천년을 견디고 있는데, 그게 15cm 정도의 오차만 있어도 무너진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게 안 무너지잖아요. 지금 현대 건축기술도 절대 불가능한 거예요. 현대 최고의 건축기술을 가지고 피라미드 만들어도 그런 것은 절대 못 만듭니다. 모퉁잇돌이 정확하게 놓여졌고 으뜸 모퉁잇돌이 제대로 있으면 안 무너진대요. 그렇지만 으뜸 모퉁이돌이 제거되면 전체 구조물이 흐트러진답니다.
눅 6:48 그는 집을 짓되 깊이 파고 기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도다. 홍수가 나고 물살이 그 집에 세차게 부딪치되 그 집을 흔들지 못하였나니 이는 그것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라.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모퉁잇돌이 정확하게 셋팅되면 모든 것이 안전하다.
우리 삶의 집을 예수님 위에 짓고 모든 삶의 기반을 예수님에게 두면 모든 게 안전하다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우리는 돈이 더 안전하잖아요. 나 혼자 두면 그렇게 될 심산이 커요. 돈이 반석이고, 동창회나 향우회, 직장이 모퉁잇돌이 된다고요.
벧전2:6 “그를 믿는 자는 당황하지 아니하리라”
세상 살다 보면 당황할 일이 많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나의 반석으로 삼고 그 위에서 살게 되면 당황할 일이나 어려운 일이 없다는 겁니다. 세상살이가 쉽다는 거예요. 우리는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 앞에서 당황하게 되지요.
6. 생명의 빵
요 6: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이 생명의 빵이십니다.
우리가 배고파 굶어 죽지 않으려면 빵(음식)을 먹어야 되요. 이 생명의 빵은 어떤 것일까요? 형태가 있는 것일까요? 맛은 어떻고 원재료는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하루에 두끼 내지 세끼 밥을 먹지만 잘 모르는 요리가 나오면 원산지며 요리방법이나 영양성분 등을 찾아보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죠.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이 빵이 얼마나 맛있는지 또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게 될 때 이것을 먹고 싶어하겠죠.
입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를 많이 따지는데, 마음으로 들어가는 진짜 생명의 빵(음식)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관심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의 빵 즉 생명을 살리는 음식이라고 하셨으니 예수님을 모르고는 이 음식에 대해서 설명이 안되지요. 우리는 누군가가 음식을 만들어서 나에게 먹으라고 줄 때 그 음식에 대해서 확신이 서지 않으면 잘 안 먹겠지요. 그런데 구체적인 설명을 듣게 되면 예를 들면 내가 당뇨가 있는데 당뇨에 좋다고 하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잘 먹겠죠.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도 똑같지 않느냐, 그냥 “예수 믿어” 하니까 내가 왜 믿어야 되는데? 이러한 반문만 듣게 되죠.
이 생명의 빵은 각종 질병을 고칠 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도 살리는 빵인데, 만일 우리가 죽은 사람도 살리는 음식이 미국에 있다면 미국에 가겠어요 안 가겠어요? 분명히 열 일을 제쳐두고 가겠죠. 이 빵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 되는 것 아니냐!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죽는 것이 가장 겁난다면서요.
오래전 사람이 먹으면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불로초를 찾아 전세계를 뒤진 진시황이 있었죠. 이 사람은 거대한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영웅이었지만 늙음과 죽음 앞에서는 무력한 자신을 발견한 것이죠. 만일 이 사람에게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소개했다면 믿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사람은 예수님 오시기 전 BC200년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소개할 때, 즉 어떤 사람에게 전도를 할 때 물로 고문하는 식으로 하지 말고 이 생명의 빵을 스스로 먹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소개하는 지혜가 필요할 때라고 봅니다.
제가 외국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한국에 오면 오래 만에 만나는 지인들께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면서 식당을 예약해요. 맛있는 식당은 외딴 골짜기에 많이 있다 보니 어렵지만 그래도 찾아가서 먹어요. 심지어 서울에 돈 있는 사람들은 제주도 서귀포 어디에 싱싱한 해산물이 있다면 비행기 타고 먹으러 간다고 그래요.
예수님도 빵이죠, 그 나라 사람들에겐 가장 중요한 음식입니다. 그 빵을 먹으면 주리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고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요한복음 4장의 수가성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 여인의 마음속으로부터 그 생수를 원하게 만들었잖아요.
여기 미얀마의 오지에서 전도를 하면서 이 사람들에게 어떠한 형태로 전도를 해야 되겠는가 참 많은 생각이야 하지만 바로 여기에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22: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누구의 자손이냐?”
그분이 생명의 빵으로 우리가 원하고 원하는 모든 것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얼마만큼 정확하게 전달 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여기서도 예배당에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우선 핸드폰, 자동차, 집, 돈, 건강 등등 뭐 이런 것들 달라고 기도를 참 많이 해요. 예수님을 잘 모르니까 그런 세상 것들에 온통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 안에 이미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을 모르니까 다른 엉뚱한 것을 원하는 거예요. 그러한 마음속에 예수님이 모든 것이라는 것을 알도록 지혜롭게 가르치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7. 보물과 진주
마태복음 13장에 하늘왕국의 비유가 나오는데 보물과 진주의 비유도 있어요. 보물은 영적 이스라엘(성도 개인)이라고도 하고 진주는 교회(유기체)다 하기도 하는데 그런 것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죠.
마 13:44 ¶ 또 하늘의 왕국은 마치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으니라.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숨겨 두고 그것의 기쁨으로 인해 가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어떤 분께서 밭에 숨겨진 보물 때문에 자신의 모든 소유를 주고 밭을 통째로 샀습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은 사람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지혜와 명철과 지식을 말합니다.
전 2:1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내 말들을 받으며 내 명령들을 네게 감추어 두기를 원하여 2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고 네 마음을 명철에 쏟으며 3 참으로 지식을 따라가며 외치고 명철을 얻으려고 네 목소리를 높이며 4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고 감추어진 보화들을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밭(땅)은 사람인데 씨를 뿌릴 수 있도록 밭갈이가 잘된 밭입니다. 씨뿌리는 비유에서 볼 때 노상(路上)도 아니고, 돌밭도 아니고, 가시덤불 가운데도 아닌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내는 정상적인 밭입니다.
이러한 보물을 소유한 사람은 하늘왕국의 백성이 되기를 사모하며 그것을 찾으려 여행을 떠나게 되는 사람 즉 회개하는 마음 밭을 소유한 사람을 말하며 구약의 욥이나 신약에서 예수님을 만난 죄인들 및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소유 즉 영존하는 생명의 빵을 주시기 위해 대속물이 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이런 보물을 가진 밭을 찾고 계십니다.
내 개인이 그런 보물이 숨겨진 마음 밭을 간직하게 되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 가치는 하나님 자신의 생명(그분이 가지신 모든 소유)과 교환가치에서 대등하게 보실 정도로 한 사람의 가치는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은혜입니다.
요일 3:16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셨으므로 이로써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깨닫나니
회개하는 마음이란 세상에서 얻은 것과 연결된 것들을 버리고 끊어내는 겁니다. 이것은 생각으로만 돌아가는 것만 아니라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과 거기서 얻고자 하는 것들이 무가치하게 여겨지고 대신 그 빈자리에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들에 대한 소망으로 바뀌는 삶의 모습이 나오게 됩니다.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침 뱉음 당하고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신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만이 기쁨과 희락과 소망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잘 안되는 이유는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잘 모르니까 세상에 있는 보화가 더 가치 있게 느껴지는 겁니다.
사 28:16 ¶ 그러므로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로 삼으리니 곧 단련한 돌이요, 보배로운 모퉁잇돌이며 견고한 기초로다. 믿는 자는 다급하지 아니하리로다.
이 말씀은 벧전2:6에 나오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한곳에서는 “당황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다급하지 않는다” 인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황하지 않으려면 견고한 기초를 삶의 토대로 삼아야 됩니다.
요 10:7 그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양들의 문이니라.
모든 것의 기초이고 문이신 이분 위에 집을 짓고, 이분을 통해서 드나드는 것만이 올바른 길로 가는 것이고 올바른 삶이며, 이 문을 통할 때 보화도 있고 생명의 빵도 있고 우리의 행복한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는 것입니다.
8. 주님과 의사(醫師)
대하 16:12 아사의 통치 제삼십구년에 그의 발에 병이 생겨 마침내 그의 병이 심히 중하게 되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주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사들에게 구하였더라.
막 5:26 그녀가 많은 의사에게 많은 일들로 고통을 받고 자기가 가진 모든 것도 허비하였으나 좋아진 것이 없고 도리어 더 심해지던 차에
욥 13:4 그러나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없는 의사들이니라.
막 2:17 예수님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온전한 자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으나 병든 자들에게는 필요하니 나는 의로운 자들을 부르러 오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 하시니라.
참 의사는 예수님인데 모든 질병을 고쳐 주시고 모든 아픔을 고쳐 주시는 유일한 의사가 예수님이라면 예수님이 고치시는 병은 어떤 병일까요?
아사왕은 주님께 맡기지 않고 의사에게 맡긴 것이 화근이 되어 죽었습니다.
성경에서 각종 질병이 나오고 예수님께서 다 고쳐 주시는데, 그것은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영적인 질병 즉 죄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이 일들을 육신적인 사건으로 보니까 교회당에서 병원같은 짓거리를 하게 됩니다. 안수하면 모든 병이 낫는다면 병원이 뭐 필요하겠어요. 이 육신은 세상의 병원한테 주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육신을 치료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것은 그분이 창조주이시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어떤 기계가 고장이 나면 그 기계를 만든 사람에게 수리를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가끔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위해 성령님을 통한 기적의 치유 은사를 주신적도 있지만 이 은혜시대와는 거리가 있는 일입니다.
막2:17에서 “온전한 자들”과 “병든 자들”, “의로운 자들”과 “죄인들”을 대비시켜 육적인 일을 통해서 영적인 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죄인들을 회개시키는 것은 영적인 병을 고치는 것입니다.
내가 영적으로 병들어 죽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나를 살려줄 수 있는 의사를 찾게 되죠.
어떤 병원이 당뇨를 100% 치료한다고 소문이 나면 모든 당뇨환자가 가고 싶어 하죠.
그런데 진짜 의사는 예수님이라고는 하는데 예수님께서 무슨 병을 고쳐 주시는지는 모르기 때문에 거기 가야 될 이유가 없는 거죠. 문제는 내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모르고, 예수님이 어떤 의사인지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건강하다고 생각하니까 의사에게 갈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성경에서 우리 아담의 모든 자손들은 혼이 죽어 있다, 혹 반쯤 죽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신약에 예수님 만난 병자들이 참 많아요. 그 병자들 하고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를 들면 사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손 오그라든 사람, 문둥병자, 눈먼 사람, 귀먹은 사람, 귀신들린 사람, 38년 된 허리 꼬부라진 사람, 유출병 있는 사람, 나중에는 병들어서 죽은 사람도 만나요. 그 사람들이 모두 실제 나의 다른 모습이라면 이해를 하시겠습니까?
성경에서는 나를 그런 병자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정작 그런 병자가 아니예요 그러면 이 의사가 필요 없겠죠. 예수님은 모든 병을 고치는 의사이지만 그분에게 가야 될 이유도 없고 그분을 만나겠다는 마음이 생길 이유도 없지요. 나는 모든 면에서 멀쩡한 건강한 상태라 생각하지요.
롭 3: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救贖)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R 25 그분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한 화해 헌물로 제시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참으심을 통해 과거의 죄들을 사면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려 하심이요,
그렇지만 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이 병자라고 진단하셨으며 오직 예수님 만이 그 병을 고칠수 있다고 하십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믿어야 될 이유가 있을 겁니다. 내가 병들었는데 그 병을 고쳐줄 수 있다고 하시지만 정작 나는 아닌데요, 나는 병자가 아닙니다 하면 그 능력을 주실 수 없게 되어 고칠 수가 없게 됩니다.
“저는 스스로 고칠 수 없는 병자입니다. 고쳐 주세요” 하는 것이 믿는 거라고요.
과연 내 마음속에 예수님이 필요한가!
오늘 예수님에 대한 내용 중에서 몇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참으로 사랑스러우시고 아름다우시고 꿀 같은 단맛을 가지신 분 그리고 으뜸 모퉁잇돌, 모든 것에서도 안전한 반석이시고 기초이시고 생명의 빵이시고 그리고 내가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문이시고 위대한 의사이시지만, 내 자신이 병들지 않고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고 내가 더 아름답고 내가 더 훌륭하면 그분이 필요 없죠.
믿는 것은 현재 시제예요. 미래에 일어날 지옥 가는 것 때문에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사실 위장된 믿음일 수 있습니다.
의사가 병을 고치려면 “나는 환자이니 고쳐주세요” 해야 되는데, 나는 아픈데 없어요 하면 손 쓸 수 없습니다.
“너는 치료를 받아야 돼”하면 “그렇습니다 저는 병들었으니 고쳐주세요” 또는 나는 배 고프고 목이 마르니 음식을 주십시요 라고 고백하는 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이 취하는 행동이죠.
믿음은 맡기는 행동이 뒤따르게 되어 있는데, 말로는 믿는다 하면서 자신을 맡기지 않으면 실제 믿음은 없는 거죠.
의사에게 병 고치러 갔는데 의사가 치료 하는데 그 칼은 소독했어요? 확실히 가능한가요? 안되면 어쩌죠? 이렇게 불신하면 치료가 안되지요. 온전히 맡겨야 됩니다. 죽이든 살리든 그게 믿음이 있는 행동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가지려면 그분을 올바르게 잘 아는 것이 우선입니다.
9. 내가 곧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니라.
히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었는데 20 이 길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곧 자기의 육체를 통해 거룩히 구분하신 것이니라.
성경에는 길에 대한 말씀이 많은데 길의 종류는 두 가지 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길이냐 아니면 나의 길이냐?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이 하나님의 길이냐 나의 길이냐 항시 체크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길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길은 한문으로 道, 영어는 way, 주님의 길은 his way, 나의 길은 my way, 나의 길이 주님의 길로 바뀌어야 됩니다.
요 14:6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이 길은 “새롭고 살아있는 길”인데 살아있다는 것은 환경에 따라서 수시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정된 길은 공식적이고 정형화된 길, 예를 들면 경부고속도로는 항상 같은 길입니다.
살아있는 길이라면 항시 그 상황이 바뀔 수 있겠죠.
그 길은 이름은 같은 길이지만 항상 모습이 똑같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각자에게 주어지는 살아있는 길은 각자에게 가장 잘 어울리게 만들어 놓은 맞춤 길인 셈이죠.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주님의 길을 예수님과 함께 가기 위해서는 그분을 알아야 됩니다.
오늘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을 우리가 왜 깊이 알아가야 되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 서론적으로 살펴 봤습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찬송가 456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어린아이 같은 우리 미련하고 약 하나
주의 손에 이끌리어 생명 길로 가겠네
꽃이 피는 들판이나 험한 골짜기라도
주가 인도하는 대로 주와 함께 가겠네
옛날 선지 에녹같이 우리들도 천국에
들려 올라 갈 때까지 주와 같이 걷겠네
후렴
날 마다 날 마다 주 예수와 함께 날 마다 날 마다 우리는 걷겠네 아멘
[Lb1]창조주와 구속주 예수님
[Lb2]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는 관점은?
창조 1:26-27
현재 욥14:15
마13:44 보물
[Lb3]십일조는 하나님의 어린양
히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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