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서론 및 등장인물
주님께서 욥기는 왜 적으셨을까?
욥은 과연 누구인가?
욥기는 동방의 우스 땅에서 태어난 어떤 사람의 며칠간 고통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이야기가 전부일까?
욥이라는 사람이 등장하면서 곧장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에 이어 욥에게 뜻하지 않는 환난이 닥치고 세 친구와 대화가 이어지면서 엘리후가 나타나고 종국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서 모든 것을 정리하시는 것이 욥기의 개략적인 줄거리입니다.
특히 하나님과 사탄이 직접 대면한 상황에서 대화를 이어 나가는 내용은 성경 전체적으로 매우 특이한 부분입니다.
욥과 세 친구 및 엘리후에 대한 말씀과 사탄에게 직접 말씀하신 내용에서 우리는 각 인물들에 대한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화나 소설을 볼 때 등장인물에 대한 개요를 모르면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가 없듯이 인물에 대한 탐구가 없으면 내용의 많은 부분이 무의미하게 됩니다. 단지 재미있었다, 재미없었다 정도이지 실제 전하고자 하는 본질에는 접근하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사탄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구체적으로 따져 들어가면 사탄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사탄에 대한 내용은 많은 부분 숨겨져 있기 때문에 깊은 탐구를 통해서 밝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욥기는 매우 중요한 책이라 봅니다. 사탄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들 곁에 존재하는지 또는 어떤 방법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공격하는지 그러한 유혹과 공격에서 승리하는 방법 등의 내용이 매우 상세하게 기술된 책이 욥기입니다.
욥기에 나오는 사람은 욥과 세 친구, 엘리후인데 이들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으면 욥기는 어려워집니다.
욥기를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교훈이 왜곡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우리가 아는 바 욥은 우스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흠이 없고 의로우며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라고 판단하십니다.
욥 1:1;우스 땅에 욥이라는 이름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흠이 없고 의로우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더라 (직역하면 “악에서 돌아선 자더라”).
우스 땅은 현재 사해 남동쪽 요르단의 페트라(Petra) 지역입니다. 칠 년 대환란 때 이스라엘 민족이 적그리스도를 피해서 도망가서 살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 지역을 에돔이라 하며 야곱의 형제인 에서의 땅입니다.
거기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어요.
“우스”는 “회개하는” 혹은 “counsel 조언”의 의미이며, “욥”은 “박해받는 자”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스 땅의 욥"은 악 뿐인 이 세상을 등지고, 영원한 생명이 거하는 진리의 길에 대한 빛의 조언자를 찾고 있는 회개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은 흠이 없고 의로우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악에서 돌아선 사람이라고 판단하셨는데 이것은 율법을 잘 지켜 범죄 하지 않아 의로웠지만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않고, 태어나면서부터 소유한 점 때문에 항상 힘들어했으며, 이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욥은 영적으로 악에서 돌아선 상태였지만 아직 완전한 선을 성취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담의 형상을 가진 모든 사람 마음에는 선과 악이 함께 있는데 이 상태를 양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양심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생긴 것으로 욥은 양심을 가진 아담의 세대입니다. 아담의 세대는 그리스도의 세대로 호적이 바뀌어야 합니다.
욥은 선악과의 독에 중독되어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을 함께 지닌 사람이지만, 악에 종속되어 죄악에 빠져 사는 현재의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선)을 찾아 나선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욥을 처음부터 구원받은 성도로 보면 욥기 전체가 혼돈스럽게 됩니다.
어떻게 귀로 들어서 구원을 받습니까?
구주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만나려면 눈을 떠야 하며,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리고 찾아 나서야 하죠.
욥은 자신이 처한 사망의 어두운 계곡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실 구원자, 중보자, 위로자, 조언자를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세 친구와 엘리후와 창조주 하나님께서 차례로 욥에게 나타나 중보와 위로와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욥이 원하던 참다운 중보자, 위로자, 조언자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눅 15:17; 그제야 그가 정신을 차리고 이르되, 내 아버지께는 빵이 풍족하여 나누어 줄 수 있는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나는 굶어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내 아버지께 가서 그분께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을 대적하여 죄를 짓고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사오니
합 2:4; 보라, 위로 높여진 자의 혼은 그의 속에서 곧바르지 아니하나 오직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살리라.
사 9:6;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권이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이], [조언자], 강하신 하나님, 영존하는 아버지, [평화의 통치자]라 할 것이기 때문이라.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자신을 알고 두려워하며, 천성을 향해 나그네 길을 떠나는 크리스천을 연상하면 되겠습니다.
욥의 마음은 하나님과 사탄, 선과 악,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 간의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욥은 아담의 세대로써 양심을 가지고 양심의 종 노릇하며 악의 수하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전해 듣고 사탄을 섬기고 살았던 자신의 과거를 완전히 청산하고 하나님을 직접 만나기 위해서 천성을 향해 가고 있는 순례자입니다.
욥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기 42장에서 비로소 욥은 하나님을 만나 뵙고 구원을 받습니다.
사탄의 입장에서는 간계로 탈취하여 자신의 종으로 만든 욥을 원 주인이신 하나님께 빼앗길 처지에 놓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자신의 피조물(아들)인 욥을 되찾아 오셔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탄은 욥의 혼을 두고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그 전쟁사를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 욥기입니다. (존 번연의 “거룩한 전쟁” 참조)
이 전쟁의 승패는 무엇으로 판가름 날까요.
욥 1:11; 그러나 이제 주의 손을 내미사 그의 모든 소유에 대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주의 얼굴 앞에서 주를 저주(축복)하리이다, 하매
욥 2:5; 그러나 이제 주의 손을 내미사 그의 뼈와 살에 대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주의 얼굴 앞에서 주를 저주(축복)하리이다, 하매
욥이 하나님을 저주(축복)하게 되면 사탄이 승리합니다. 그것은 곧 욥은 사탄에게 도로 종속되고 죄악 가운데서 살다가 생을 마치면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욥의 아내도 저주(축복)하고 죽어라고 합니다.
세 친구들도 끝까지 욥이 하나님을 저주(축복)하게 설득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저주(축복)한다는 것이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사탄과 아내가 사용한 저주란 “축복”과 같은 단어인데 성경에서 유일하게 저주로 번역된 곳입니다.
이 말은 사람(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을 축복하게 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이 됩니다.
사탄이 재산과 사업장과 자식과 육신의 생명으로 욥을 쳤을 때 만일 욥이
“이 재앙은 저의 범법으로 인한 결과이니 손을 스스로 깨끗하게 씻고 앞으로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 잘 모실 테니 저를 다시 살려 주십시오.” 이렇게 외치고 달려가서 종교적 행위를 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전쟁에서 사탄이 승리하게 됩니다.
욥의 환난은 자신의 범죄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욥은 흠이 없는 자라고 판단하셨습니다.
그럼 세 친구는 어떤 사람인가요?
욥 42:7; ¶ 주께서 욥에게 이런 말씀들을 하신 뒤에 주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 진노가 너와 네 두 친구를 향해 타오르나니 너희가 내 종 욥과 같이 나에 대하여 옳은 것을 말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옳지 않은 말을 했다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타오를 정도로 잘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조금은 옳고 조금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전적으로 잘못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며, 반대로 욥은 전적으로 옳은 말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기준으로 욥기 전체를 읽어봐야 합니다.
욥은 항상 옳고, 세 친구는 항상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욥기 설교를 들어보면 욥의 인내를 이야기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에서 욥은 하나님 앞에 뻔뻔스럽고 욥의 세 친구는 더 옳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판단을 잘못하신 건가요, 아니면 하나님의 공의가 후퇴한 것입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욥의 세 친구는 완전히 틀렸습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 빌닷이 이야기한 성경구절을 참 많이 인용하지요.
집집마다 상점마다 액자에 넣어 그럴듯하게 장식까지 해서 걸어두는 것이죠.
욥 8:7; 비록 네 시작은 작을지라도 네 마지막 끝은 심히 크게 되리라.
이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만 잘못된 말입니다. 욥은 처음부터 동방의 가장 큰 자였습니다. (욥1:3)
우린 성경에 있는 말씀이라고 좋게 인용해 쓰고 있지만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분의 뜻 안에서 읽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때로 욥은 형편없고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는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욥 22:23; 네가 만일 [전능자]께로 돌아가면 세워지겠고 또 네가 네 장막에서 불법을 멀리 치우리라. 24; 그때에 네가 금을 흙처럼, 오빌의 금을 시내의 돌처럼 쌓으며 (엘리바스)
이 말씀은 “네가 만일 네 장막에서 불법을 멀리 치우고, 전능자께로 돌아가면” 로 고쳐 읽는 것이 쉽습니다. 만일 내가 내 불법을 스스로 멀리 치울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필요가 없지만, 우리는 스스로 내 불법을 절대로 치울 수 없습니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치는 것이 종교입니다. 만일 욥이 세 친구들의 조언대로 한다면 하나님을 저주하게 되어 이 전쟁에서 사탄이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후는 어디에도 안 나오다 갑자기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전혀 엘리후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어요. 엘리후에 대해서 욥도 이야기 안 합니다.
저 혼자 나타나서 이야기하고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사탄은 욥기 1장, 2장에서 욥을 고소하는 부분에서 나오고 그 후에 사탄도 안 나타나요. 하나님께서 그 이후에 사탄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으시고 40장과 41장에서 베헤못과 리워야단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사탄이 순순히 물러날 존재인가요?
엘리후는 적 그리스도입니다. 가인이나 가룟 유다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가장해서 욥을 유혹합니다.
이 욥기는 전쟁 이야기인데, 하나님과 사탄, 그리스도와 적 그리스도, 선과 악의 전쟁입니다. 엘리후는 악의 본체이며 세 친구는 악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세 친구는 종교와 철학과 윤리 도덕을 중시하는 인본주의를 기독교 교리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긍휼과 은혜와 믿음에 대항하는 대표적인 것이 종교와 철학과 윤리 도덕입니다.
사탄이 사용하는 도구가 몇 개가 있는데 개인에 대해서는 육신의 생명과 물질적 재산과 자손의 성공입니다.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인간을 조종하면서 하나님을 제대로 못 믿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세 친구는 결국 욥을 정죄하는데 실패했고 도리어 욥에게 설득당해 욥의 믿음에 합류하게 됩니다.
욥 32:1; 욥이 그들의 눈에 의롭게 여겨 졌으며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이 말씀은 세 친구들의 눈에 욥이 의롭게 보였기 때문에 세 친구들의 입이 다물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세 친구는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렸다고 하는데, 욥은 자신의 환난에 대해서 "이유는 모르지만 죄를 지었기 때문은 아니다"라는 말로 논쟁을 했는데, 욥의 세 친구는 25장을 끝으로 더 이상 욥에게 응답하는 것을 그치게 됩니다.
욥의 말에 대해 더 이상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욥의 말을 믿게 된 것입니다.
욥 32:3; 또 그의 세 친구를 향하여 그의 진노가 타오른 것은 그들이 대답을 찾지도 못한 채 욥을 정죄하였기 때문이라.
엘리후가 세 친구에게 진노가 타오른 것은 욥을 정죄하지도 못하고 도리어 자신들이 설득을 당한 것 때문입니다.
사탄은 자기가 이용하는 수하들을 보냈는데 각각 종교, 윤리도덕, 철학의 대표를 보냈는데 욥에게 져버렸습니다.
사탄은 처음에 욥의 재산을 치고, 다음에는 사업을 쳤어요. 이 시절 낙타는 수출입 운송수단입니다. 낙타가 없어졌으니 사업이 다 망한 겁니다.
그다음에 자식 열명이 다 죽었지만 욥이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아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욥의 육신을 칩니다.
그래도 안되니까 욥의 세 친구인 종교와, 철학과, 윤리 도덕을 보낸 겁니다. 그런데 이것도 욥을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사탄이 아니죠.
맨 나중에는 사탄이 엘리후의 모습으로 직접 나타났습니다.
항상 적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그리스도)께서 나타나기 전에 먼저 나타납니다.
욥 32:2; 그때에 람의 친족 중에서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의 진노가 타올랐는데 욥을 향하여 그의 진노가 타오른 것은 그가 하나님보다 도리어 자기를 의롭다 하였기 때문이요,
엘리후의 진노가 타오른 것은 자신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자신이 직접 나타난 것입니다.
람의 친족이라고 나오는 람은 하이(high)로 "높음"입니다. 또 엘리후의 뜻은 "내가 하나님이다"라는 뜻이에요.
대부분 욥기 강해에서 욥은 인내는 하지만 하나님께 반항하는 듯한 모습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엘리후는 자신이 그리스도인 것처럼 가장하고 등장합니다. 그래서 내용을 자세히 살펴봐야 합니다.
엘리후의 이야기 속에는 참람하고 거짓된 말들이 참 많습니다.
욥 32:2에서도 엘리후는 거짓말로 욥을 송사하고 있습니다. 욥기 3장부터 31장까지 욥의 이야기 속에는 욥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의롭다고 한 사실이 없습니다.
욥 9:20; 내가 스스로 의롭다 하면 내 입이 나를 정죄할 것이요, 내가 말하기를, 나는 흠이 없다, 하면 그 말이 또한 내가 비뚤어진 것을 입증하리라. (욥의 응답)
욥은 스스로 흠 없고 의롭다 하지 않았으며, 단지 하나님께서 욥을 흠 없고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판단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례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욥 34:31; 하나님께 이렇게 아룀이 참으로 합당한 일이니 곧, 내가 징계를 받았사온즉 다시는 죄를 짓지 아니하겠나이다. 32;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주께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불법을 행하였을지라도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하는 것이라. (엘리후의 이야기 중 일부)
만일 사람이 스스로 죄를 짓지 않고 불법을 치울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필요가 없습니다.
나 스스로 나의 죄를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주셔서 나의 죄를 해결하셨는데 이것은 종교를 합리화시키는 사탄의 교묘한 전략입니다.
욥이 엘리후의 조언을 듣고 그대로 따라서 한다면 욥은 하나님을 저주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후를 이렇게 판단하셨습니다.
욥 38:1; 그때에 주께서 회오리바람 속에서 욥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2; 지식이 없는 말들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이자는 누구냐?
이자가 욥입니까? 엘리후입니까?
한글 성경으로 보면 알기가 힘듭니다. 그렇지만 영어 성경을 보면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욥 38:2; Who is this that darkens counsel by words without knowledge?
darken counsel 은 어둠과 혼돈의 조언입니다.
욥은 네 사람 즉 세 친구와 엘리후의 조언을 듣고 있습니다.
엘리후의 조언이 끝나고 난 직후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럼 욥 38:1에서 하나님께서 지적하신 “이자”는 엘리후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후를 지식이 없는 말들로 “어둠과 혼돈의 조언”을 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지한 말로 진리를 왜곡하여 욥을 혼란에 빠뜨리는 자가 엘리후라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십니다.
그럼 엘리후 말을 32장부터 37장까지 읽어 보면서 어떤 것이 엉터리인지 보겠습니다.
욥 32:2; 그때에 람의 친족 중에서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의 진노가 타올랐는데 욥을 향하여 그의 진노가 타오른 것은 그가 하나님보다 도리어 자기를 의롭다 하였기 때문이요, 3; 또 그의 세 친구를 향하여 그의 진노가 타오른 것은 그들이 대답을 찾지도 못한 채 욥을 정죄하였기 때문이라.
세 친구에게는 욥과의 변론에서 진 것에 대한 화풀이를 하고 있고, 욥에게는 거짓말로 욥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첫마디부터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욥 4:17;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의롭겠느냐? 사람이 자기를 만드신 분보다 더 깨끗하겠느냐?
이들은 엘리바스에게 나타난 이상한 잡귀 같은 존재가 한마디 던진 말로 욥을 계속 정죄합니다. (참조 욥 9:2, 욥 25:4, 욥 32:2)
창세기 3장에서 이브를 속여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였듯이 욥기에서도 사탄은 교묘하게 속이고 있습니다.
이런 엘리후를 그리스도의 예표로 생각한다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욥 33:3; 내 마음의 올바름 속에서 내 말들이 나오며 내 입술은 지식을 분명하게 말하리로다.
양심의 작용과 본질을 알면 이것이 사탄의 간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옳음 즉 양심의 판단에서 내 말이 나온다. 이 말은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양심의 말이 종교와 윤리도덕과 철학의 근본 뿌리입니다. 이것들을 우리는 인본주의라 합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신본주의 즉 하나님 중심입니다.
태양계에서 모든 행성은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듯이 우리 모든 피조물은 내 마음대로가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과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엘리후는 종교와 윤리도덕과 철학을 가지고 자기 수하들이 못했던 것을 다른 각도로 말하고 있습니다. 매우 간교합니다.
욥 33:6; 보라, 내가 그대의 소원대로 하나님을 대신하노니 나 역시 진흙에서 빚어졌느니라.
땅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유일한데 그런데 이 자가 그리스도 자리에 올라가 있습니다.
엘리후가 참 그리스도의 예표라면 거짓말을 하며, 인본주의를 옹호하겠습니까?
성경 안에서 사탄에 대한 내용은 대부분 숨겨져 있습니다.
찾고 찾아야 그 존재는 찾아집니다.
욥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중보자가 필요하며, 그분께서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합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자기가 하나님의 중보자라고 하지만 그는 진흙덩이에 불과합니다.
욥 33:13; 어찌하여 그대가 그분과 다투느냐? 그분께서는 자신의 일들 중의 어떤 것도 해명하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들 중 어떤 것도 해명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틀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는 매우 상세하게 자신이 만든 사람에게 사랑의 표현을 하십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오해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38장 2절에 “어두운 조언을 하는 이자는 누구냐?” 하신 것입니다.
욥 33:32; 만일 네가 할 말이 있거든 내게 응답하여 말하라. 나는 그대를 의롭게 하기를 원하느니라.
이 말은 창조주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사탄은 스스로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 있습니다.
욥 34:4;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판단의 공의를 택하고 무엇이 선한지 우리끼리 알아보자.
판단의 공의는 창조주 하나님만 가지고 계시며, 피조물에게는 없습니다.
사람 스스로 판단의 기준은 양심입니다. 판단은 옳고 그름,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별하는 것을 말하는데 본성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판단합니다.
내 양심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느냐? 아니면 하나님 말씀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느냐?
내 양심은 하나님과 대적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판단의 공의 만이 우리가 구하고 따라야 할 유일한 행동 기준이어야 합니다.
"무엇이 선한지 우리끼리 알아보자."
우리의 양심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논하고 그것을 우리의 행동지침으로 삼아야 되지 않느냐? 그것에서 진리를 찾아야 되지 않느냐? 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종교와 철학과 윤리도덕 아닙니까? 이런 부분을 빼 버리면 욥기는 말장난에 불과할 것입니다.
욥 34:9; 그가 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는 것이 그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아니한다, 하였도다.
욥기 어디에도 욥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욥 34:11; 그분께서는 사람의 행위대로 그에게 갚으시고 각 사람이 자기의 길들에 따라 얻게 하시느니라. (엘리후)
만약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대로 갚으시면 이 세상 사람 단 한 명도 지옥을 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 한 사람도 지옥에 안 가시기를 원하시며, 각자의 행위대로 심판을 안 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셨고 또한 모든 사람이 회개에 이르도록 길이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긍휼 하심과 넘치는 은혜의 선물을 모두 무시해버리는 자가 엘리후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계속 추구하면 100% 사망입니다.
주님의 길로 가야 합니다.
친구들이나 엘리후의 조언대로 하면 욥은 회개하지 못하며 구원 못 받습니다.
이런 독소가 선악과의 독소입니다. 지금도 성경을 가르치는 많은 분들이 선악과 독소를 사람들에게 먹이고 있어요. 이런 엘리후를 그리스도의 표상이라고 하니까 …
오늘은 욥기에 대한 전반적인 개요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더 자세하게 찾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럼 과연 욥기의 주제가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욥의 인내를 가르치기 위해서 적은 부분도 맞습니다. 그렇지만 과연 본질이 그것만 있겠느냐?
회개하는 욥을 두고 하나님과 사탄이 벌이는 거룩한 전쟁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