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483장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483장 찬송을 부른 이유는 노래가사의 2절 두번째 단락에 나오는 “네 이웃을 늘 사랑하여”란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제2회 내용을 정리하는데 처음으로 나오는 말씀이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입니다.
눅 10:25 ¶ 보라,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그분을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으리이까? 하매 26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율법에 무어라 기록되어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느냐? 하시니 27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하매 28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옳게 대답하였도다. 이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 하시니라. 29 그러나 그가 자기를 의롭게 만들려고 예수님께 이르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하니 30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나매 그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그에게 상처를 입혀 그를 반쯤 죽이고 떠나갔느니라. 31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오다가 그를 보고는 다른 쪽으로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 사람도 그가 그곳에 있을 때에 와서 그를 바라보고는 다른 쪽으로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을 하다가 그가 있던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그에게 가서 기름과 포도주을 붓고 그의 상처를 싸매며 그를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 떠날 때에 이 데나리온을 꺼내 주인에게 주며 그에게 이르되, 그를 돌보아 주라. 당신이 얼마를 더 쓰든지 내가 다시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느니라. 36 이제 너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 하시니 37 그가 이르되, 그에게 긍휼을 베푼 자니이다, 하매 이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서 너도 그와 같이(그렇게) 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10장25절부터 37절까지 나오는 이 비유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대부분의 설교를 들어보면 여기 나오는 사마리아인처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주위의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일들을 많이 합니다. 이러한 행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 말씀 때문에 그런 일들을 한다면 그건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이 말씀은 분명 그런 행위를 권장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런 행위로는 절대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비유 말씀의 주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입니다.
먼저 등장인물을 살펴보면 예수님과 율법사 및 강도와 강도 만난 자, 제사장, 레위 사람, 사마리아 사람, 여관 주인이 나오죠.
특히 사마리아인은 기름과 포도주와 데나리온을 가지고 여행을 하고 있으며, 강도만난 자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옷을 벗기고 상처를 입어 반쯤 죽은 상태로 쓰러져 있는 중에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자와 같은 길로 가고 있는 장면입니다.
성경 말씀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제사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즉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제사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레위기서에 나오는 제사와 연결되는 내용입니다.
구약에서 제시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로 누가 누구에게 드려야 하는가? 즉 제사를 드리는 주체가 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자기의 죄에 대해서 아뢰고 그 죄를 사해 주시기를 간구 드리는 것이 제사의 본질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 하는 사람은 제사드릴 필요가 없겠죠.
저는 죄인으로 죄 때문에 하나님과 떨어져서(혼이 죽은 상태) 불행한 삶을 살고 있고 결국은 지옥 불바다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불쌍한 존재이지만 이러한 나를 하나님께서는 불쌍히 여겨 주시어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그 방법이 제사입니다.
두번째는 제사를 드리는 장소입니다.
장소는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시는 장소에서 드린 제사만이 유효합니다.
창 22:2 그분께서 이르시되, 이제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유일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일러 줄 산들 중의 하나에서 그를 번제 헌물로 드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나온 후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성막을 주셨고 다윗왕과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산당이나 성전이 아닌 곳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하여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때에는 예수님의 몸이 성전입니다.
요 2: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을 헐라. 사흘 안에 내가 그것을 일으켜 세우리라, 하시니 20 이에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육 년이 걸렸거늘 네가 그것을 사흘 안에 세우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그분께서는 성전인 자기 몸을 가리켜 말씀하셨더라.
그리고 지금 교회시대에서는 성도의 몸이 성전입니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번째로는 제물이 있어야 됩니다. 이 제물도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으며,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그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 제물이 되실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히 10:9 그 뒤에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내가 주의 뜻을 행하러 오나이다, 하셨으니 그분께서 첫째 것을 제거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10 바로 이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영원히 드려짐을 통해 우리가 거룩히 구별되었노라. 11 제사장마다 날마다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희생물들을 드리되 그것들은 결코 죄들을 제거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이 사람은 죄들로 인해 한 희생물을 영원히 드리신 뒤에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사 13 그 이후부터 자기 원수들이 자기 발받침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느니라. 14 그분께서는 거룩히 구별된 자들을 단 한 번 헌물을 드림으로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셨느니라.
네번째로는 제사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제사장에 의해서 제사가 드려져야 합니다.
삼상 13:9 사울이 이르되,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이리로 내게로 가져오라, 하고 그가 번제 헌물을 드렸더라. 10 그가 번제 헌물 드리기를 마치매, 보라, 즉시 사무엘이 오므로 사울이 나가서 그를 맞으며 그에게 문안하니라.
사울은 제사장인 사무엘을 기다리다가 급한 마음에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게 됩니다. 예수님은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야 되는데 제사의 기준을 충족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기준은 오직 예수님 자신만이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율법을 섬기는 율법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등장하는데, 제사는 제사장만 할 수 있고 레위인들이 그걸 도울 수가 있어요.
제사를 지내는 성막이나 성전의 모든 기구 같은 것들은 레위인만 손댈 수가 있어요. 레위인과 제사장은 율법에 따르는 구약의 제사를 말하고 있으며 이 제사로는 강도만나 반쯤 죽은 이 사람을 살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제사장이나 레위인 자신 조차도 동일한 상태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 10:12 ¶ 이제 이스라엘아,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오직 주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분의 모든 길로 걷고 그분을 사랑하며 또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섬기며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소와 양을 잡는 형식적 제사가 아니라 마음의 제사를 말합니다.
제사와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신명기10:12 “그분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섬기며”와 같이 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없다 생각하는 사람은 이렇게 할 필요가 없죠.
다음에는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전지전능하시고 사랑과 긍휼하심과 은혜가 무궁한 분이심을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믿지 않으면 그럴 필요가 없는 거죠.
또 하나님을 두려워하려면 하나님께서 나를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을 두려워하게 되면 그분의 길로 따라가게됩니다.
그분의 모든 길로 걷는다는 것은 내 자신이 좋든 싫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우면 싫어도 따라 가게 됩니다.
믿음의 행위가 좋아서 나오기 보다는 두려움에서 더 많이 나와요.
반면에 내 스스로 그분이 좋아서 그분을 섬기는 것은 그분을 사랑할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따른 믿음에서 사랑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해가는 겁니다. 사랑은 힘과 강요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강력한 힘이 사랑의 힘입니다.
성경 기자도 믿음에서 사랑으로 점진적인 변화가 필요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리의 기초 원리들을 떠나 완전함으로 나아가서 죽은 행위들로부터의 회개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2 침례들에 관한 교리와 안수와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의 기초를 다시 놓지 말지니라.
그리스도 교리의 기초들 즉 죄사함에 대한 회개와 믿음, 침례, 안식, 부활, 심판 등의 내용을 가지고 계속 되풀이하지 말고 더 완전한 곳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완전함에 나아간다”는 것은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골 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라. 사랑은 완전하게 매는 띠니라.
이런 내용을 볼 때 제사의 본질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를 받으시는 분과 제사를 드리는 사람 두 존재의 생각이 일치될 때 제사라는 행동이 나오게 되는데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바로 이 점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2,000년 전에 나를 자신과 같이 이미 사랑하셨고, 이제는 내가 창조주 하나님 즉 주 예수그리스도를 나와 같이 사랑하게 될 때 완전한 제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0장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결론은 “하나님께서 이미 너를 사랑하셔서 다 이루어 놓았으니 너도 예수님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이란 말은 상대가 있다는 것인데 최소의 이웃은 일대일로써 두 사람 사이를 말합니다.
누가복음10장에서 율법사가 질문한 이웃은 단수로 한 사람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을 자신의 사역을 비유로 해서 예수님 자신을 지칭하고 계십니다.
즉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분은 하나님이면서 사람이신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내 주위의 여러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웃이란 말은 상대가 있는데 서로 상대에 대한 마음이 일치될 경우에 성립합니다. 한 사람은 상대를 사랑해서 이웃이라 부르는데, 다른 사람은 원수로 생각하고 있다면 이 둘의 관계는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이웃이 되려면 두 마음이 상호 공감이 일어나야 이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웃이라는 단어를 쓰셨는지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람이 제사를 드리는 이유는 “나는 죄인으로 죽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죄를 사해 주시고 살려 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죄인도 아니고 자신이 죽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제사 지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추석이나 설 명절 때 조상에게 제사를 하는 이유는 조상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내가 필요로 하는 뭔가를 받을 수 있을까 기대 때문에 하는데,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도 이와 같이 내게 세상적인 유익을 구하기 위한 마음이라면 그 제사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런 관계를 성경에서는 거래관계 혹은 비즈니스 관계, 외모로 보는 관계, 위선 등으로 보는데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은 피조물과 거래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사마리아 사람(예수님)의 이웃이 되려면 율법사(나)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강도만난 사람과 같이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 나를 온전히 맡기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는다”와 “맡기다”란 말은 헬라어에서 같은 단어입니다.
요 2:24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그들에게 맡기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아셨기 때문이요,
나는 온전한 죄인으로 혼(자아)이 죽어 있는 산 송장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믿게 될 때 비로소 온전히 맡겨지며 완전한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이미 사랑하셔서 2,000년 전에 갈보리 십자가 상에서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쏟아 부어 주심으로 나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확정해 주셨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마태복음13장의 보물 비유와 같은 내용입니다.
마 13:44 ¶ 또 하늘의 왕국은 마치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으니라.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숨겨 두고 그것의 기쁨으로 인해 가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물로 비유했지요. 이런 마음을 소유한 사람을 그분의 모든 소유 즉 그분의 생명을 주시고 사셨습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 가지고 계시는 끝없는 사랑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먼저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제는 내 차례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이웃인 사마리아 사람(예수님)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그분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요?
강도만난 사람은 강도에게 옷을 빼앗기고 상처를 입고 반쯤 죽어 있습니다.
인류역사 최초로 옷을 강탈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창 3:6 여자가 보니 그 나무가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이므로 그녀가 그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한 자기 남편에게도 주매 그가 먹으니라. 7 그들 두 사람의 눈이 열리매 그들이 자기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고는 무화과나무 잎을 함께 엮어 자기들을 위해 앞치마를 만들었더라.
여기서 아담과 이브는 뱀(사탄)에게 속아서 선과 악을 알게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는데 옷이 없어져 버렸고 스스로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었으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은 즉시 그들의 혼(자아)이 죽어버렸습니다.
“상처를 입혀, wounded”는 상처입은 것도 맞지만 원형이 훼손된 상태로 보는 것이 더 사실적입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마음 밭이 훼손된 상태를 이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 밭에 죄성(원죄)이 들어온 상태입니다.
이 상처는 내 스스로 치유 불가합니다.
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죄성,원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자범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그래서 이 강도만난 자는 율법사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의 첫 조상인 “아담”과 또한 그의 모든 후손들 바로 “나 자신”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육신은 살아있지만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진 상태 즉 혼이 죽은 상태를 예수님께서는 반쯤 죽었다고 표현하십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 앞에서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주님, 저는 강도를 만나 하나님께서 입혀 주신 영광스러운 빛나는 의의 옷을 빼앗겼고, 죄로 물든 마음 때문에 죄를 짓는 죄인이 되었으며, 아버지 하나님을 떠난 존재가 되어있습니다. 부디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 저의 상처를 치료해서 저를 살려 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는 마음이 예수님을 자기자신처럼 사랑하는 표현입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두 분입니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과 땅에 오신 예수님이 우리가 사랑해야 될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해서 사랑해야 되며, 예수님은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면 됩니다.
히브리서 9장과 10장에서 완전한 제사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Heb 10:4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들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니라.
구약의 제사로는 죄로부터 사면은 되지만 죄를 완전하게 제거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완전한 제사가 필요했고 그 제사를 예수님께서 완벽하게 지내셨다는 것입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이 행하는 율법의 제사로는 강도만나 얻은 반쯤 죽은 상처를 치유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사건에서 율법을 통한 형식적인 제사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장막절입니다.
장막절에는 계속 제사를 지냅니다. 장막절 5일 이전은 대 속죄일입니다. 장막절기 시작이 7월 15일이며 대 속죄일은 7월10일입니다. 이 사건은 대 속죄일도 지냈고 장막절도 지낸 직후의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기간 동안 계속 율법의 제사를 지낸 직후라 자기들은 죄없이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간음죄를 지은 여인을 잡아서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온 것입니다.
이 여인은 율법에 의해 정죄 받고 빛이신 예수님 앞으로 나왔으며,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갈 3:24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
율법에 따른 제사를 마친 유대인들이지만 마음의 문제 앞에서는 전혀 힘을 쓸 수 없었습니다. 간음하고 있는 여자를 현장에서 붙잡아 바로 데리고 온 상태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그런 여자를 자신들의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음에서 무엇이 올라 올까요?
마 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그녀에게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녀와 간음하였느니라.
여자를 붙잡아 온 유대인들은 자신들도 동일한 간음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양심의 가책을 받고 다들 도망가 버렸지만 이 여자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만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문제 앞에서 율법의 제사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자신 있게 나는 아니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이 사건 와중에 예수님께서는 땅에 두 번 쓰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기록한 돌판은 두개가 제작되었는데 처음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셨고 두번째 것은 모세가 만들어 가지고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돌판을 만드시고 직접 쓰신 계명은 마음판에 쓰신 것인데 이것은 타락과 함께 깨졌으며, 모세가 만든 돌판에 쓰신 것이 구약 율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돌로 치라고 명령하심으로 율법을 이루셨고 그 여자를 용서하심으로 사랑도 실천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함께 실천할 수 없는 율법과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하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시 139:13 주께서 내 콩팥을 소유하셨으며(내 속 마음을 지으시고 그 중심에 하나님의 형상을 채우시고) 내 어머니 태에서 나를 덮으셨나이다. 14 내가 주를 찬양하리니 내가 두렵고도 놀랍게 만들어졌나이다. 주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놀라우므로 내 혼이 그것을 매우 잘 아나이다.
시편139편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의 일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글입니다. 13절은 주님께서 사람의 마음과 육신을 함께 지으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콩팥(reins, 혹은 장부)는 속 마음을 뜻합니다.
사람 마음에 쓰신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이 타락하면서 잃어버렸고(깨져버렸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돌판에 쓰신 율법을 주셔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수 있는 길을 제시하셨으며, 결국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깨져버린 하나님의 형상(마음)을 복구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깨어진 하나님의 사랑의 표식을 회복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통한 참 제사입니다.
모세로부터 주어진 율법의 제사는 마음에까지 영향을 못 미칩니다.
모세의 율법은 종교적 행위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속 내용은 믿음과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신 30:6 또 주 네 하나님께서 네 마음과 네 씨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시고 네 마음을 다하며 혼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사 네가 살게 하시며
율법의 완성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 말씀 안에 다 들어있다.
롬 13:9 너는 간음하지 말라, 너는 살인하지 말라, 너는 도둑질하지 말라, 너는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너는 탐내지 말라, 한 것과 어떤 다른 명령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이 말씀 안에 간략하게 들어 있느니라. 10 사랑은 자기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눅10:28 “네가 옳게 대답하였도다” 율법사가 바르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내용에 대해서 인정하시면서 “이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율법사에게 “너는 죽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사는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의로운 사람인 것을 뽐내고 예수님을 시험(유혹)하여 함정을 파고 있습니다.
눅10: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일어나(rise up)는 존재는 마귀 및 그와 연결된 존재들입니다. 이 행동 한 개를 보면 율법사의 마음이 어떠한 상태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사람의 속마음을 모르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속 마음을 모두 아십니다.
이 구절이 없다면 우리는 성경을 읽어도 율법사의 의도를 알 길이 없게 되어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헤아릴 수 없게 됩니다. 율법사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대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본질도 교만입니다.
사실은 이 율법사와 예수님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사의 마음은 마귀에게 가 있습니다. 욥기1장에서 사탄은 하나님 앞으로 스스로 올라왔으며, 이사야14장에서 루시퍼가 스스로 올라옵니다. (himself rise up)
사 14:13 네가 네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내가 하늘로 올라가 내가 하나님의 별들 위로 내 왕좌를 높이리라. 또 내가 북쪽의 옆면들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
동일하게 여기 율법사도 예수님 앞에서 스스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을 때 올라가야 하는데 피조물이 스스로 올라간 것은 반역이며 전쟁입니다.
이 율법사의 속마음을 모르면서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참 의미를 놓치기 쉽습니다.
여기서 율법사는 예수님을 유혹해서 멸망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4장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유혹)한 것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이 내용은 전쟁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사를 자신과 같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율법사가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율법사의 참 이웃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답을 눅10:28에서 끝내셨는데, 율법사는 자신의 교만 때문에 알아듣지 못하고 두번째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웃이 누구인지 질문한 것은 자신의 의를 증명해 보이기 위함이지 실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누구와 같이해야 합니까?
1. 사마리아 사람처럼 한다.
2. 강도만난 자처럼 한다.
3. 강도처럼 한다.
답은 2번 강도만난 자처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저는 안 죽었고 살아가는데 지장 없을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습니다. 내 힘으로 노력해서 십일조도 드리고, 일요일에는 반드시 예배에 참석하고, 말씀대로 죄 안 짓고 선하게 살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욕 안하고 살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언제나 그분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며, 그분의 하신 말씀대로 따르는 것이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일 5:3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니라. 그분의 명령들은 무겁지 아니하니라.
그분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 13:34 내가 새 명령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주신 새 명령은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그분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누가 누구를 사랑하라는 것인가?)
여기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것”은 동일한 내용입니다.
두 내용에 내포된 뜻은 나는 예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나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한 제사의 제물로 그분의 살과 피를 주셨고 자신이 직접 대제사장이 되셔서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히 9:24 그리스도께서는 손으로 만든 거룩한 처소들 곧 참된 것의 모형들 안으로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하늘 그 자체 안으로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느니라. 25 또 그분께서는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들의 피를 가지고 거룩한 곳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신을 드려야 할 필요가 없으시니 26 그랬더라면 그분께서 반드시 세상의 창건 이래로 자주 고난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라. 그러나 이제 세상 끝에 그분께서 단 한 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느니라. 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이것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 한 번 드려지셨으며 또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죄와 상관없이 두 번째 나타나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리라.
율법의 제사에는 죄인인 사람이 자신의 것으로 자신을 위한 제물을 마련했지만 완전한 제사의 제물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으로 직접 주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물의 차이, 노아의 제사, 아브라함의 제사 등 하나님께서 주신 제물로 드리는 제사야 말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십니다. 사람의 힘으로 마련한 제물은 받지 않습니다. 사람의 것으로 굳이 드리려고 하는 행위가 종교입니다.
가인은 종교행위를 한 첫 사람입니다. 그의 후예들이 종교를 더욱 발전시켜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욥기에서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가 욥에게 조언하는 내용은 모두가 종교행위를 조장하는 것이지만 욥은 끝까지 믿음을 지킵니다.
나의 죄값은 내가 마련해야 하지만 나는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못한 가난뱅이(마5:3마음이 가난한 자)임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예수님을 통해 스스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그 몸을 나를 위한 대속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그 제물을 내가 무슨 수를 쓰든 내 힘으로는 구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분의 은혜와 긍휼하심을 바랄 뿐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은 서로 상대방이 같은 마음일 때 성립합니다. 갑이란 사람은 을을 이웃으로 생각하는데 을은 갑을 원수로 생각한다면 이들은 이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이웃으로 생각 하시지만 정작 내가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면 서로 이웃이 안되는 것입니다.
레위기서 19:13-18에 보면 율법에서는 이웃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나옵니다.
13절에서는 “네 이웃을 속여 빼앗지 말고” 즉 사기 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히 믿음을 핑계삼아 이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용한 사람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라” 이것은 일을 했는데 급료를 안주는 것. 이웃을 저주하지 않는 것, 걸림돌을 두지 않는 것, 공평하고 의롭게 재판하는 것, 이웃끼리 싸우지 않는 것, 마음속으로 미워하지 않고 죄를 짓지 않도록 책망하는 것 등의 내용이 이웃에게 하면 안되는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의 마음속을 다 알고 있지만 죄악으로 안 빠지게 하기 위해서 인도하고 계시는 것을 봅니다. 이렇듯 율법의 세밀한 부분까지도 예수님은 다 지켰기 때문에 율법에 완전하신 분이고 죄가 없으신 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삶을 보면 구약의 모든 율법을 완벽하게 행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을 볼 때 말씀의 내용이 예수님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먼저 살피고 난 후에 나에게 적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구약과 나를 직접 대비하면 성경의 본 뜻과는 멀어질 염려가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내용은 예수님 설명서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분에 대해서 쓰여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 5:39 ¶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은 곧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들이니라.
구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분의 사랑과 은혜와 위대하심을 알아간다면 그분의 사랑 안에 살고 싶고 내 자신을 그분께 맡기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겠습니까.
레19:18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율법에서 이렇게 말씀해 놓았지만 사람은 불가능합니다. 사람끼리 참다운 사랑은 할 수 없지만 그 속성을 이해할 수 있겠 끔 남녀의 사랑, 부모의 사랑, 형제의 사랑 같은 것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이웃 된 사람 사이는 서로 이웃이 됩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머리로 모신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내 몸의 손과 발, 머리가 서로 이웃이듯 같은 원리입니다.
누가복음10장에서 율법사가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은 예수님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이자는 예수님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눅 10:29 그러나 그가 자기를 (스스로) 의롭게 만들려고..(to justify himself)
자신의 힘이나 노력으로 스스로 의롭게 되는 것은 종교로서 가인의 길입니다.
결국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주도해서 예수님을 죽이게 됩니다.
눅 10:30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나매 그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그에게 상처를 입혀 그를 반쯤 죽이고 떠나갔느니라.
강도만난 자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을 잃어버리고 지옥으로 가야하는 운명을 진 모든 아담의 후손에 대한 비유입니다. 여리고는 땅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도시로 저주받은 곳입니다.
31절과 32절에서 제사장과 레위인도 동일한 길을 가고 있으며, 이들은 강도만난 자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눅 10: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을 하다가 그가 있던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을 하는데 하늘나라에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이미 기름과 포도주와 데나리온을 준비해서 가지고 오셨습니다.
눅 10:34 그에게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그의 상처를 싸매며 그를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고
그분이 오신 목적은 상처를 고쳐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제사에는 항상 빵과 기름과 포도주가 사용되는데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빵이시고 손에는 기름과 포도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눅 4:18 주의 영께서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그분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기 때문이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마음이 상한 자들을 고치며 포로 된 자들에게 구출을, 눈먼 자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상처 입은 자들을 자유롭게 하며 (참조 사61:1)
그런데 상처를 고치기 위해서는 기름이 필요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름은 성령을 의미하며 구약에서 왕이나 제사장에게는 기름을 부었습니다.
요 3:5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강도를 만나 죽어 있는 우리는 성령을 통해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기름과 포도주는 거룩하게 성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출 29:21 제단 위에 있는 피와 기름 부음에 쓸 기름을 취하여 아론과 그의 의복들과 그의 아들들과 그와 함께한 그의 아들들의 의복들에 뿌릴지니라. 그리하면 그와 그의 의복들과 그의 아들들과 그와 함께한 그의 아들들의 의복들이 거룩하게 되리라.
막 14:24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하나님의 왕국에서 새롭게 마시는 그 날까지 다시는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2장에서 먼저 사람들이 마신 포도주는 소돔과 고모라 품종의 포도나무 열매로부터 나온 것이며(신명기32장32), 예수님께서 만들어 주신 포도주는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기름과 포도주를 가지지 못한 아담의 후손은 사마리아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기름과 포도주를 가지신 예수님 만이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강도만난 자로써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 살려 주시기를 간청 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히 7:11 그러므로 만일 레위의 제사장 체계를 통해 완전함이 있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의 제사장 체계 하에서 율법을 받았느니라) 아론의 계통에 따라 부르심을 받지 아니하고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르는 다른 제사장이 일어날 필요가 또 있었겠느냐? 12 제사장 체계가 변하였은즉 율법도 변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제사의 방법이 바뀐 것입니다. 제사장과 제물과 성전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의 계통에 따르는 제사장은 계파가 없습니다.
히 7: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니라. … 2 …그 이름을 해석하면 첫째로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또한 살렘 왕이니 곧 화평의 왕이라. 3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혈통도 없고 날들의 시작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오직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되어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은 바로 예수님 입니다.
눅 10:35 이튿날 떠날 때에 이 데나리온을 꺼내 주인에게 주며 그에게 이르되, 그를 돌보아 주라. 당신이 얼마를 더 쓰든지 내가 다시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느니라.
일 데나리온은 하루의 품삸입니다. (마20:2)
그리고 하루는 천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벧후3:8)
거듭난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오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몸을 가지고 승천하실 때와 동일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영광의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살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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